전자장치·배터리 집적화에 ‘키 오프(Key-off)’ 화재 위험 급증
올해만 17건·170만 대미 전역 누적 320만 대 달해
“건물과 멀리 떨어진 야외 주차하라” 제조사 경고문 발송
부품 부족에 수리 연획… 공동주택 거주자들 주차 대란
주행 중이 아닌, 시동을 끄고 주차장이나 차고에 정차해 둔 차량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미국 내 운전자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최신 자동차에 첨단 전자 장치와 고전압 배터리가 밀집 탑재됨에 따라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도 회로 단락이나 발열로 불이 나는 일명 ‘키 오프(Key-off)’ 화재 위험이 급증한 탓이다.
이로 인해 당국과 자동차 제조사들이 “화재 위험이 있으니 차량을 건물이나 구조물과 떨어진 야외에 주차하라”는 내용의 emergency ‘야외 주차(Park Outside)’ 리콜 권고를 쏟아내고 있지만, 대안 없는 경고에 차주들은 극심한 주차난과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자동차 이력 조회 전문업체 카팩스(Carfax)의 최신 집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 전역에서 화재 위험으로 인해 ‘야외 주차’ 리콜 조치가 내려진 채 도로를 누비는 미수리 차량은 약 320만 대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통계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NHTSA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내려진 야외 주차 리콜 명령만 총 17건으로, 대상 차량은 170만 대에 육박한다. 이는 NHTSA가 2015년 건물 및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야외 주차’ 위험 등급을 신설한 이래 가장 가파른 증가세다. 당국은 특히 올 여름철에만 지프(Jeep) 차량 100만 대에 대한 파워 스티어링 펌프 전기 배선 결함 리콜을 포함해 8건의 긴급 야외 주차 경고를 잇달아 발령했다.
실제 피해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사라 라메르센 씨는 지난해 말 소유 중이던 2022년형 지프 랭글러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차량의 고전압 배터리 발화 위험으로 야외 주차 리콜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리콜 예약을 잡기도 전, 딸이 운전하던 중 차량에 불이 붙어 차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파되는 사고를 겪었다. 노스다코타주 파고에서는 한 남성이 차고로 들어섰다가 주차되어 있던 현대 싼타페 차량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 대피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기이한 화재의 원인으로 자동차의 ‘첨단화’와 ‘전동화’를 지목한다. 최신 차량일수록 자율주행 보조 시스템, 열선 시트 모터, 스타터 리레이, 파워 스티어링 펌프, 고전압 배터리 등 무수한 전자 부품과 복잡한 전기 회로가 밀집된다.
NHTSA 조사관 출신의 안전 컨설턴트 프랭크 보리스 씨는 “엔진 시동은 꺼져 있을지 몰라도 회로에는 24시간 내내 높은 전력이 흐르며 상시 열이 발생하는 구조”라며 “차량 내 전자 장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고장이나 단락으로 불이 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안전 연구 기관 '소비자 안전 연구 및 전략(Safety Research and Strategies)'의 션 케인 대표 역시 “최근 차량들은 엔진룸 내부 공간이 매우 조밀하게 설계되어 부품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며 “이로 인해 엔진을 끄더라도 잔열이 과거보다 훨씬 오래 유지되어 화재로 이어지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리콜 통보를 받은 차주들이 현실적인 대안을 찾지 못해 발을 굴리고 있다는 점이다. 브레이크나 에어백 결함 등 일반적인 리콜은 주행 중에만 주의하면 되지만, 야외 주차 리콜은 가만히 세워둔 상태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집 전체나 차고, 인근 건물로 불이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조업체가 리콜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된 부품을 수급하여 실제 수리를 제공하기까지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린다. 그동안 차주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은 채 기약 없는 야외 주차를 이어가야 한다.
특히 아파트나 콘도 등 공동주택에 거주해 전용 실내 지하주차장을 이용해야 하거나, 야외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은 도심 거주자들의 고충이 극에 달하고 있다. 지프 그랜드 체로키 4xe 차주인 스티브 호밀 씨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불편이자 말 그대로 난장판”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차량의 경우 화재 위험과 도난 위험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기도 한다. 도난 방지 장치(임모빌라이저) 미착용으로 도난 표적이 된 일부 현대·기아차 모델의 경우, 야외 주차 리콜까지 겹치면서 차주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션 케인 대표는 “차주들로부터 '집이 불타는 것도 싫지만, 차를 밖에 대두었다가 털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절박한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전국자동차안전센터(Center for Auto Safety)의 마이클 브룩스 이사는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세워둔 차에 불이 나는 것은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 위험”이라며 자동차 제조사들의 조속한 기술적 해결책 마련과 부품 수급을 촉구했다.